솔직히 저는 영화 '박열'을 처음 봤을 때 이 청년이 왜 조선 관복을 입고 일본 법정에 섰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단순히 일본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박열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치밀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일본 제국주의를 조롱했는지를요. 이 영화는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이 저지른 조선인 대학살과, 그 참극 속에서 희생양이 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을 향한 광기
박열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이지 독립운동가 였습니다. 불령사라는 조직을 만들어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저항했고, 심지어 황태자 암살 계획까지 세웠던 인물이죠. 물론 폭탄을 만들 능력도, 돈도 없었지만 그들의 의지만큼은 확고했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인상 깊었던 건, 박열이 단순히 독립만을 외친 게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입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본을 강타했습니다. 사망자만 10만 명이 넘는 초대형 재난이었죠. 혼란에 빠진 일본 정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를 퍼뜨립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있다"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로 일본 자경단은 무고한 조선인 6천 명을 학살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이 학살이 단 3일 만에 벌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정부가 의도적으로 만든 희생양, 그것이 바로 조선인이었습니다.
박열과 불령사 회원들은 자경단을 피해 오히려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밖에 있다간 죽을 게 뻔했으니까요. 하지만 감옥도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혼란을 덮기 위해 한 명의 제물이 필요했고, 그 제물로 박열을 지목했습니다.
조선인학살을 덮으려는 일본, 그리고 박열의 선택
일본 정부는 박열을 '천황을 노린 위험한 테러범'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의 불만을 돌리고, 자신들의 무능을 감추기 위한 총알받이가 필요했던 거죠. 박열은 이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차라리 자신이 그 제물이 되어 불령사 전체가 엮이는 걸 막기로 한 겁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박열이라는 인물의 진짜 면모를 봤습니다. 그는 단순히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상황을 읽고 역으로 일본을 조롱할 줄 아는 전략가였습니다. 박열은 일본 정부가 원하는 대답 그 이상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황태자를 죽이려 했다"고 당당히 고백한 겁니다. 일본은 발칵 뒤집혔고, 박열에게 대역죄라는 최고형을 씌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박열은 이 모든 과정을 오히려 조선인의 자긍심을 드러내는 무대로 바꿔버립니다. 재판장에 나갈 때 그는 죄수복이 아닌 조선 관복을 입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일본 법원은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당당히 조선의 옷을 입고 법정에 섰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이 바로 이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희생양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을 심판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아나키스트 박열과 후미코, 사랑과 저항
박열의 곁에는 동지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본인이었지만 조선에서 자란 경험 때문에 조선의 독립에 깊이 공감했고,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영화에서 최희서가 연기한 후미코는 정말 강렬했습니다. 그녀는 박열 못지않게 당당했고, 일본 법정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연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동지였고, 같은 이상을 품은 전우였습니다. 일본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을 조롱하며 조선인의 존엄을 지켰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시대극에서 특유의 유머와 따뜻함을 잘 살려냅니다. 무겁고 어두운 소재임에도 영화 곳곳에 소소한 웃음이 있었고, 그게 오히려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잘 드러냈습니다. 박열과 후미코가 서로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은,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영화 '박열'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억압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말이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자는 게 아니라, 과거의 용기를 현재에 되살리자는 의미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박열을 희생양으로 삼는 과정을 통해 권력의 폭력성과 부당함을 드러내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법정에서 보여준 당당한 태도는 저항의 상징으로 남습니다. 다만 일본 사회 내부의 정치적 맥락이나 학살의 참혹한 현실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인물 중심의 드라마에 치중했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열'은 역사적 사건을 대중에게 환기시키고, 오늘날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는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된다. 박열처럼 당당하게, 비열하지 않게,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맞서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이 빛나는 이 영화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분들께 추천합니다.